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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유관순 열사 부고 실은 이유는…

유관순 열사의 부고 기사가 29일 뉴욕타임스 온라인판에 게재돼 관심을 끌었다. 뉴욕타임스는 1851년 창간 이래 부고 기사가 압도적으로 백인 남성 위주였다고 스스로 반성하면서 최근 '간과된 사람들(Overlooked)'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과거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사망 당시 부고 기사가 실리지 못한 여성들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도 소설 '제인 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 혼자서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 앨리슨 하그리브스 등의 생애가 부고 기사 형태로 소개됐으며 이날은 유 열사의 일대기가 소개됐다. 기사는 유 열사가 16세의 이화학당 학생 신분으로 일제 점령기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인 3.1만세운동을 평화적으로 이끌었으며 17세에 사망한 후 민족의 영웅이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한 달 이상 지속돼 7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유 열사를 포함한 4만6000여 명이 투옥된 평화적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이 상세히 소개됐다. 유 열사의 업적에 대해서는 33인의 민족대표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3.1운동이 시작된 후 3월 5일 남대문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일 이후 선교사 도움으로 석방되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 등을 소개했다. 또 기독교 집안이었던 유 열사 가족 9명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점과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독립을 외쳤던 점 등이 부각됐다. 유 열사는 계속된 고문에 따른 부상으로 1920년 9월 28일 1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으나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며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고 기사는 덧붙였다. 이어 2015년 8월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유 열사가 수감됐던 감옥을 찾았으며 무릎을 꿇고 과거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사죄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이날 유 열사 부고 기사는 오전 한때였지만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의 메인 기사로 게재돼 타민족으로 보이는 독자들이 수십 개의 댓글을 다는 등 유 열사와 한국 독립운동을 세계에 소개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기수 기자 park.kisoo@koreadaily.com

2018-03-29

[발언대] 유관순 정신으로 남북통일을

대한독립만세 정적을 깨우는 소리가 밤 12시면 서대문감옥 안에서 터져 나온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부모님을 비롯해 동네에 알리고 한 달을 준비하여 4월 1일 (음력 3월 1일) 충청도 목천 아우내 장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 현장에서 왜경의 총탄에 부모님을 잃고 유관순은 붙잡혔다. 공주법원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7년의 선고를 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밤 12시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이다. 삼일절이면 독립선언문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유관순 열사를 잊을 수가 없다. 조국의 반만년 역사에 온 국민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하나된 날이다. 온 동포가 똑같이 태극기를 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날이다.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독립을 향한 밑거름이 되고저자 조국강산에 자기를 바친 날이다. 독립선언문을 살펴보면 반만년 한민족의 정신적 주류를 이어온 홍익인간의 얼이 배어 있다. 인류평등과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침략군의 강권주의에 전면 도전하는 선전포고다. 그러면서도 부엌의 식칼 하나 들지 않고 손과 손에는 태극기만 든 것이다. 만세의 함성이 대포 소리를 대신했고 손에 든 태극기가 총과 칼을 대신한 것이다. 질서정연한 시위 바로 무저항의 평화적 시위였다. 당시 런던의 기자 매켄지는 '조선의 자유를 향한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 서문에 "한국 국민의 평화적인 항일 봉기는 세계적인 하나의 경이었다. …매우 고상한 애국심을 발휘한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엊그제가 96주년을 맞은 삼일절이었다. 온 겨레가 온 강산에 외친 대한독립만세와 유관순 열사의 독립만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지가 토막 나도록 외친 만세 소리는 7천만 국민을 깨우는 소리다. 애국애족에 무감각해진 온 동포와 위정자 지식인들을 깨우는 소리다. 이제 태극기를 양손에 들자. 핵폭탄과 달러를 들었던 손을 내려놓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자. 위정자들이여 국민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가? 남북통일을 원하는가? 7천만 겨레가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때 여기에 소통이 있고 통일이 있다.

2015-03-02

[하루를 열며] 유관순을 열사를 기리며

'잊혀진 계절'이란 노래가 해마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반복되어 나오듯 3월 1일이 가까와지면 유관순 누나라는 노래는 풍금 반주에 맞추어 방방곡곡에 있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울려 퍼졌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3.1운동은 한용운 스님 등 민족을 대표한 33인의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인 만세운동은 20세 전후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엄청난 사건 한복판에는 청춘이라 불리는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소위 후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군사 통치나 독재 정치에 저항하는 운동인 아랍의 봄이나 오렌지 혁명 등 사회운동 중심에는 학생들이 있음을 보면 젊음이야말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이 틀림없다. 그런데 3.1운동 당시 유관순(1902. 12. 16~1920. 9. 28) 열사가 세상을 떠난 나이는 꽃띠 청춘이었다. 그 나이의 처녀는 뒹구는 낙옆만 보아도 까르르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다는 감수성이 예민한 때인데 유관순도 입을 활짝 벌리고 커다랗게 웃은 적이 있었을까. 유관순 하면 식민지가 된 나라의 설움에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비장함으로 무장한 잔다르크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온 국민을 울린 "아버지예 이만하믄 잘 살은 거지예" 하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힘들게 사는 속에서도 간간히 웃던데 유관순도 때로는 배꼽을 잡고 웃어 본 적이 있었을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개인의 능력을 개발해 주는 창조적인 교육이 아닌 이미 주어진 것을 외우는 식의 주입식 교육이다. 그러다 보니 인터뷰 마이크를 주거나 사람 앞에 서면 떨거나 긴장에 온몸이 얼어 버린다. 자기가 보고 느낀대로 말을 하는 게 아닌 외우고 있는 정답을 잘 기억해 말하려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유관순 열사가 지금 한국을 본다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서울은 물론 전국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한 빌딩 숲과 뻥 뚫린 거리 K-POP이란 생기발랄한 청춘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 숨넘어갈 듯 즐거워 할 것 같다. 자기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었다며. 그러다 소위 일류대 들어가야만 한다며 밤낮없이 책과 씨름하며 친구란 내가 밟고 지나가야만 할 웬수로 여기는 젊은이들이나 프로페셜한 돈벌이 선수가 되려 전력질주하는 잔혹한 젊은이들의 모습에는 "저런 식으로 청춘을 보내라고 내가 목이 터지도록 서울과 천안에서 독립을 감옥에서도 기 죽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단 말인가" 하며 긴 한숨 내쉬며 억울해 하지 않을까. 맨해튼이 아닌 플러싱만 나가도 한인의 맨파워가 초라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한인은 인구가 적으니 양질로 자라야 한다.그런데 교실과 학원 사이를 오가며 오직 입시 책만 들여다 보며 자랐다면 그런 자들이 과연 세계 속에서 몇이나 빛을 낼 수 있을까. 교실만이 아닌 교실 밖에서 자연을 숨쉬고 사람 관계를 익히는 생기 있는 교육이 될 때 창조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양질의 동량들이 되지 않겠는가. 3.1절 기념 행사를 꾸준히 하는 의미는 일제 강압 통치라는 상황에서 일으킨 자주독립운동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갑질이라는 강제에 맞선 우리 선배의 기개를 기억하고 불의(不義) 강제가 있을 때에는 우리도 굴하지 않고 대항하는 후손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리는 게 아니냐 말이다. 3.1절 행사는 꾸준히 하면서 일제 시대를 찬양하거나 미국.중국에 대한 시대주의를 긍정하는 듯한 양면적인 세력이 있다면 유관순이란 이름으로 철퇴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201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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